거제 외도

거제외도

 

작년 이 무렵에 거제외도를 다녀온 포스팅을 이제야 올려본다.

한국관광 100선에 들어가는 외도는 과거에는 바위만 무성한 황폐한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었다.  육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전기시설도 통신시설도 없었다.  광복 직후에는 8가구만이 살고 있었는데, 배로만 갈 수 있는 접근성이 떨어진 곳인 데다가 광복 후 초기에는 변변한 정박시설조차 없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경사진 밭에 고구마를 심거나 돌미역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을 하였다.  기상이 악화되는 날이면, 10여일씩이나 교통이 두절되어 곤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1969년 7월 이창호는 이 근처로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우연히 하룻밤 민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73년까지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사들이게 된다.  이 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이었는데, 부부는 이 섬의 자연에 매료되어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1970년대 초반부터 이 섬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고구마밭에 감귤나무 3천 그루와 편백 방품림 8천 그루를 심어 놓고 농장을 조성하였는지만, 번번히 실패를 겪고난 후 농장 대신 식물원을 구상하여 30년 넘게 가꾸면서 오늘날의 외도로 다듬어졌다.

1971년 당시 통영군 용남면과 거제군 사등면 사이의 견내량해를 잇는 거제대교가 세워짐으로 인해 거제도는 섬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날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거제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동부와 남부에 끼고 있어 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외도해상농원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편입되었으며, 오늘날 거제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155,372m²(47,000평) 규모의 농원 안에는 3,000여 종이나 되는 식물들이 있는데, 대부분 이름조차 생소한 외국식물들이다.  또한 모든 건물들이 지중해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거제도

거제도를 여행하기에는 동백꽃 피는 3월경이 가장 제격이다.  그 즈음에는 남부면과 일운면을 지나는 14번 국도 주변의 바닷가와 산자락마다 진달래·복사꽃·산벚꽃도 화사하게 피어난다.  또한 길 사정도 여유롭고 바다의 빛깔도 짙푸른 쪽빛이라 섬다운 풍정을 느낄 수 있다.

거제도는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남해안의 섬 중에 가장 크고 넓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하지만 그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려면, 적잖은 다리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강 다리만한 신거제대교를 건너고, 고속도로처럼 시원스레 뚫린 국도를 한참동안 달려도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시가지와,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조선소만 잇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승포항을 지나면 전혀 다른 거제도에 들어선다.

우선 길부터가 다르다.  해안선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레 구부러지고 오르내리는 2차선 도로로 바뀐다.  그리고 장승포항에서 거제 해금강까지의 칠십리 길은 줄곧 전망 좋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데, 이 길가에는 팔색조가 깃드는 동백숲과 맑은 해조음으로 귀를 씻어주는 몽돌해변이 자리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거제도의 대표적인 절경은 역시 해금강이다.  면적은 0.1㎢ 에 불과하고 전체가 깎아지른 기암절벽의 무인도지만 섬 머리께의 울창한 숲과 절벽아래의 해식동굴이 북녘 해금강에 못지않은 절경으로 소문나 있다.

동부 해안의 선착장에서 출항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으면 이곳 해금강의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해금강은 훤한 대낮보다도 동틀녘이나 달밤에 더 운치 있고, 뭍에서 바라보는 해금강은 뱃전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맨 남쪽의 무지개마을과 여차마을 간에는 그림 같은 해안절경과 환상적인 드라이브코스가 감춰져 있다.  남해안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보다 풍광 좋은 해안도로를 만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여차마을의 몽돌해변은 여름철에 해수욕과 야영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장승포항의 남동쪽 바다에 떠 있는 지심도는, 남해안의 여러 동백섬 중 가장 아름답다.  길이 1.5㎞, 너비 500m의 섬이 온통 동백나무로 덮여 있어 해마다 3월경이면 섬뜩할 만큼 아리땁고 요염한 동백꽃이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인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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