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보물선 끝나지 않은 도굴 이야기

신안 앞바다 도굴의 시작

신안 보물선 끝나지 않은 도굴 이야기


신안 보물선 끝나지 않은 도굴 이야기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수중문화재 발굴인 ‘신안선’의 발견과 발굴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신안선의 자기 유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유물 발견신고 20여 년 전인 1950년대부터라고 한다.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중 깨진 청자와 나무토막이 나오면 재수 없다며 버리기 일쑤였고, 그릇은 개 밥그릇으로, 동전 꾸러미가 나오면 아이들이 제기를 만들어 차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1975년 8월 25일 어부 최○○ 씨(당시 40대)가 그물로 조업을 하다가 6점의 청자를 인양하게 된다. 이것을 당시 무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동생이 신안군청에 신고하면서 신안 앞바다의 보물선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다. 신안선 발견의 시작이자, 10여 년간 이루어진 최대의 문화재 도굴 사건의 시작이다.

신안 앞바다 도굴의 시작
1976년 1월 9일 신안 앞바다에서 고가의 도자기가 인양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된 이후 섬마을에는 발굴단이 아닌 도굴꾼들이 먼저 냄새를 맡고 찾아들었다. 1976년부터 1987년까지 12년간 지속된 사상 초유의 해저 유물 도굴이 시작된 것이다.

신안 앞바다의 송·원대 자기의 도굴사건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76년 10월 13일이다. 정모 씨 등 도굴꾼 8명이 9월 1일부터 22일까지 청자화병 등 122점을 인양했으나 신고하지 않고 밀매하던 중 목포경찰서에 3명이 검거되고, 5명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 물주(도굴을 위한 자금책) 2명이 1월의 보도를 보고 8월 말 잠수부를 고용해 도굴한 유물 중 일부를 매매하려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잠수부 정모 씨는 “본래 인양 유물을 신고하려 했으나 1월 청자를 건진 최○○ 씨가 당국으로부터 받은 보상금 100만 원 중 60만 원을 세금으로 냈다는 사실을 알고 암거래키로 했다”라고 진술했다. 압수된 유물은 10월 19일 서울 문화재관리국으로 보내져 감정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포함된 조사단이 꾸려져 10월 26일부터 1차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런데 신안 앞바다의 도굴은 정모 씨 일당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검특별수사부 1과는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수사 끝에 3개 파 13명의 도굴범과 취득자를 입건하고, 311점의 유물을 회수했다. 10월에 구속된 정모 씨 등 도굴꾼 6명은 1976년 7월부터 9월까지 4차례에 걸쳐 230점을 인양하여 골동품상에 팔아넘겼고, 골동품상은 그 중 27점을 부산의 한 사업가에게 1,240만 원(당시 쌀 한가마니가 1만 원가량)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 크게 보도되면서‘300점을 되찾은 제2의 인양’으로 평가받을 정도였고, 수사를 주도했던 박희태 검사 또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송·원대의 자기가 완전한 모습으로 바다에서 인양된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도 가슴 뛰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신문지상에서 이러한 자기가 1억 원에 거래된 적이 있다는 기사를 본 도굴꾼들이 생명의 위협과 검거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안 앞바다로 몰려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안선 발굴 중에도 계속된 도굴
1976년 11월 말 2차 발굴조사가 끝날 무렵 조사단이 철수한 이후 도굴 방지를 위해 발굴 지점 반경 2km 이내 구역을 항해 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1,430만 원의 예산을 들여 현장 주변의 섬 두 곳에 감시초소를 만들어 감시원 4명을 배치하고, 12t급 감시선 1척을 운영키로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신안 앞바다의 도굴은 끊이지 않았으며, 현장 감시원이 도굴범과 짜고 눈감아 주는 일도 있었다. 도굴사건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978년 7월 3일, 신안유물 81점 도굴·밀매 일당 6명 구속, 21점 압수(1977년 9월 도굴)
– 1981년 3월 19일, 신안유물 9점 도굴, 밀반출 일당 5명 구속, 2명 수배, 7점 압수(1980년 3월 도굴)
– 1981년 6월 13일, 신안유물 100여 점 도굴범 7명 구속, 현장 감시원 2명이 뇌물 20만 원과 유물 30점을 받고 도굴에 협조
– 1983년 10월 31일, 도굴꾼 4명이 유물 100여 점을 불법 인양, 유물감시선 선장과 갑판장이 이를 묵인하고 그 대가로 청자 접시와 대접 5점을 받아 구속(1983년 6월 18~19일 도굴)
– 1987년 2월 5일, 신안유물 1,000여 점(시가 50억 원)을 불법 인양해서 일본 등지로 빼돌려 온 전문 도굴단 6개 파와 일본인이 포함된 해외밀반출사범 등 30명 검찰에 검거, 17명 구속, 605점의 유물 압수, 발굴이 완료된 (1984년 9월 종료) 이후인 1985년 도굴했다고 진술


보물을 재앙으로 만든 도굴 사건

1987년 대규모 도굴단 검거로 “신안 앞바다에 제2의 보물선이 있다”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그해 4월 15일부터 5월 14일까지 1개월간 조사를 수행했으나 큰 성과 없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소문은 무성했으나 실제 도굴단이 검거되거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1976년 1월부터 시작된 12년간의 신안 앞바다 도굴사건이 사실상 끝이 난 것이다. 1987년 당시 “재앙을 부르는 신안유물”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칼럼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안 해저유물은 결국 인근 주민들에게 재앙만 가져다주었다. 특히 임자도와 지도 주민들 중 상당수는 생업을 내팽개치고 도굴 유혹에 빠져, 일부는 범행을 저질러 감옥에 간 사람도 있다. 임자도에 사는 김모 씨가 도굴로 수천만 원을 벌어들여 떼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나돌자 지역 주민들 일부가 영농자금까지 대부받아 해저 보물 건지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떼부자가 된 김씨는 다시 유물 도굴을 위해 수중작업을 벌이다 감시선이 나타나자 도굴범들이 물속에 들어간 김씨를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 김씨의 동생, 처남, 매부 등 전 가족이 아직도 도굴 공범으로 수배를 받고 있어 김씨 가족은 풍비박산, 홀로 남은 김씨의 아버지는 끼니마저 걱정할 정도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고 한 수사관이 말했다.”

신안선 이후로도 바다의 문화재를 도굴하는 사건은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 최근인 2019년 5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대전지방경찰정 광역수사대가 공조하여 40년간 숨겨오던 신안선 도굴 유물을 일본에 팔려던 A씨를 검거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안선 도굴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임자도의 한 일가족이 풍비박산 난 사건과 같이 문화재 도굴의 결과는 결코 좋지 않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범죄자로 검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사건이다.  출처:글, 사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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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