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승일교 鐵原 承日橋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북괴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한탄강 협곡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이다

철원 승일교 鐵原承日橋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북괴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한탄강 협곡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이다

철원군 북방 북한 땅에서 발원한 한탄강(漢灘江)은 철원군 한가운데를 남북 방향으로 지나 포천, 연천으로 흘러간다. 한탄강은 현무암 용암 대지가 움푹 파여 형성된 강이라 강 양쪽에 높이 20~30m 기암절벽이 발달하여 있다. 그래서 한탄강은 예로부터 주민들의 동서 교류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승일교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를 기준으로 좌우 다리 모양이 다르다. 그 이유는 다리를 놓은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승일교 공사는 1948년 8월 공산 정권 아래에서 남침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절반도 놓지 못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중부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할 무렵이던 1952년 4월 미군 공병부대가 승일교 보강 공사에 투입되어 5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하였다. 미군이 주도한 승일교 공사에는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철원 땅에 남아 있던 KSC 노무 부대원들도 투입되었다. 승일교는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있는 사이 이름도 잊혀졌으나, 6·25전쟁이 끝난 후 남북 합작의 공사 과정을 알고 있는 철원 주민들은 그때부터 남한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북괴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북괴 공산 정권 아래에서 남침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을 노력공작대라는 명목 아래 5일간 교대제로 동원하여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 구주 공전 출신으로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하였고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이던 김명여 교사가 설계하여 시공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소련식 유럽 공법이라 평하며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아치교로 교량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길이 120m, 폭 8m, 높이 35m로 1948년 건설 중에는 한탄강 절벽에 시공하는 난공사였다. 다리 공사 지지대로 쓰이는 비계(飛階)용 나무는 금학산 담터계곡이나 신철원 용화동에서 조달되었고 인근 내대리 백토 광산에서 일본인이 사용하던 돌 깨는 기계도 동원되었다. 공산 정권 아래에서 다리 공사 부역에 동원되었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8세 이상 60세 미만은 1년에 18일간 부역하여야 하였고, 내대리 주민들은 30일을 일하여야 하였다고 한다. 승일교는 철원군 동송읍 장흥4리와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의 경계가 된다. 문혜사거리 국도 제43호에서 옛 철원읍 중리를 지나 묘장면, 인목면, 마장면을 거쳐 북괴의 이천으로 통하는 지방도 제463호로 이어지는 중요한 다리이다. 현재는 노후화되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다. 6·25전쟁 전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 후에 남한에 편입된 수복 지구이다. 분단과 전쟁, 수복 지구라는 역사적 특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승일교이다. 그 옆에 한탄대교를 건립하면서 기존 승일교는 통행을 폐쇄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일대를 승일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승일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태봉구문(泰封九門)이라는 조형물이다. 천년의 꿈 태봉국에서 통일 한국의 밝은 미래로 가는 9개의 문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단단한 바위를 뚫듯이 방문하는 한 사람, 한 사람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이 모여 9개의 문을 통과하면 머지않아 통일 한국의 문도 열릴 것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한편에는 6·25전쟁, 베트남전 참전기념비 및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다. 2002년 5월 31일 국가 등록문화재 제26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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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