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기품, 비교할 만한 대상이 또 없을 만큼 뛰어나다

간송 선생님이 당시 전 재산을 들여 지켜낸 여러 국보급 유물들 가운데 이 글에서 소개할 은 곧게 뻗은 목과 둥근 곡선의 몸체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백자에서 선보인 모든 안료가 사용되어 문양이 다채롭게 구현된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은은한 기품, 비교할 만한 대상이 또 없을 만큼 뛰어나다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38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님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은 오늘날 간송미술관으로 이어져 우리 문화유산을 대표할 만한 여러 수작을 만나볼 수 있다. 간송 선생님이 당시 전 재산을 들여 지켜낸 여러 국보급 유물들 가운데 이 글에서 소개할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곧게 뻗은 목과 둥근 곡선의 몸체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백자에서 선보인 모든 안료가 사용되어 문양이 다채롭게 구현된 명품 중의 명품이다.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白磁 靑畫鐵彩銅彩草蟲文 甁)>,

                            18세기 후반, 높이 41.7cm, 입지름 4cm, 굽지름 13.3cm, 간송미술관 ©문화재청



1원짜리 참기름병, 국보가 된 사연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 팔당 인근에서 낚시와 봄나물 그리고 참기름을 생계로 하시던 노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인근 야산에서 나물을 캐던 중 흰색 병을 발견했는데, 이병은 참기름을 담기에 알맞은 목이 긴 병이었다. 할머니는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이와 비슷한 병들을 주워 참기름을 담는 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병을 발견한 그곳이 바로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를 생산했던 분원(分院) 가마터였다는 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달라진다.

할머니는 야산에서 주운 그 흰 병에 직접 짠 참기름을 담아 중간 상인에게 1원씩 받고 넘겼다. 중간상인을 통해 이 참기름병을 구매한 광주리 행상 개성댁은 황금정에 있는 일본인 단골 무라노의 집으로 갔고, 어쩐지 참기름병에 마음이 갔던 무라노의 부인은 병값을 1원 더 쳐주고 참기름병까지 구입하였다.

조선백자를 단돈 1원에 구매한 무라노는 이어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다. 얼마 후 그 백자는 스미이 다쓰오라는 수집가에게 600원에 팔렸고, 1932년 스미이가 다시 경매에 내놓아 모리 고이치라는 수집가에게 3천 원에 낙찰되었는데, 모리 고이치는 1908년 대한제국의 초청으로 국내로 들어온 금융전문가이자 유명한 고미술품 수장가였다. 1936년 모리 고이치가 죽게 되자 그의 유족은 수장품을 경성미술 구락부의 주관하에 전시 및 경매하기로 결정하였다.

간송 선생님은 전시장에서 그 백자를 직접 확인한 후, 평상시와 달리 경매에 직접 참여하였다. 경매가 시작되자, 500원부터 시작된 가격이 순식간에 7천 원으로 뛰어올랐다. 이 경매에서 간송과 당대 세계적인 골동품 회사 야마나카 상회 측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 백자 병을 손에 쥔 사람은 간송이었다. 낙찰가격은 ‘1만 4,580원’으로 이는 당시 기와집 15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 낙찰가였으며, 조선백자로서도 역대 최고가였다.


절제된 화려함-순백의 조선백자, 알록달록 다채로움을 입다

길고 곧게 뻗은 목 부분과 둥근 곡선의 몸체에 아취로운 문양요소들이 조화롭게 표현된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18세기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했던 경기도 광주 분원산으로 추정된다.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 제작된 시기에는 소상팔경을 비롯한 산수문, 화훼, 초충문, 시문(詩文) 등 동시대 문인화의 주제가 청화백자의 문양 소재로 새롭게 나타나던 때였다. 또한 당시 활발했던 연행이나 사행 등을 통해 유입된 다채롭고 기교한 중국 자기는 조선백자 제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백자에 두 가지 이상의 채색 안료 사용이 두드러지거나, 기면을 뚫어내는 투각, 문양을 도드라지게 하는 양각 등 이전에 선보인 조선백자의 기술에서 보다 새로운 시도들로 이어졌다.

이 백자 병은 청화, 철화, 동화 등 세 가지 안료가 한 기물 안에 모두 장식된 조선백자 유례상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유물이다. 이 안료들은 각기 성질이 달라 소성온도나 가마 등의 제작 상황에서 까다로운 공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당시 도자를 장식하는 기법 중 가장 고난도의 기술이 적용된 것이라 볼수 있다.

문양의 구성을 살펴보면, 세 가닥으로 피어난 난초는 양각한 후 그 부위에 푸른 청화 안료로 채색하였고, V자 형태로 뻗은 가지 또한 양각한 후 산화철을 사용하는 철화 안료로 진하게 채색하였다. 국화잎은 난초 주변에 한 송이, 그 위로 세 송이를 균형감 있게 배치하였는데, 산화동을 원료로 하는 동화, 철화로 검고 붉은색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들은 각기 갈색, 붉은색의 국화를 그려낸 것인데 또 하나의 국화잎에는 아무런 채색을 가하지 않고 바탕의 백색 그대로를 자연스레 남겨둔 점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색의 국화는 양각의 도드라진 기법으로 입체감을 살릴 뿐 아니라 순백색의 바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된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 국화꽃 위를 나닐고 있는 두 마리 나비 또한 정교하게 양각되었고, 몸통과 날개 끝마디 부분에만 옅은 채색을 주어 품격있고 우아한 한 폭의 초충문이 완성되었다.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당시 기술적으로 최고 경지에 오른 조선백자의 면모와 예술적 품격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수 있다.


소홀히 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一甆之不善, 而國之萬事皆肖, 其器物之不可以小而忽之也如此.
자기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나라의 만사가 모두 그 그릇을 닮는다.
그 기물이 작다고 여겨 소홀히 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朴齊家, 『北學議』, 「內篇」瓷-

이 글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북학파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쓴 『북학의(北學議)』 중 일부 구절을 발췌한 것으로, 대학원 시절에 지도교수님께서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때 항상 사용하셨던 문구이다. 박제가는 조선시대 도자 제작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은 말을 남겼는데, 기물이 작다 하더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청화, 철화, 동화를 이용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담아낸 듯한 초충문을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자기를 제대로 완성하기까지 고군분투했을 무명의 도공들과 장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또한 우리 문화유산이 빼앗길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이 백자를 이 땅에 남겨두고자 했던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열정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겨 본다. 이들이 있었기에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그동안 이 유물에 닿았던 어떠한 일이든 소홀히 하지 않았을 많은 분들께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글. 신주혜(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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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