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철교 끊고 죽음으로 막아

칠곡 왜관철교 (낙동강구철교, 호국의 다리, 왜관 인도교)
등록문화재 제406호

왜관 철교 끊고 죽음으로 막아

칠곡 왜관철교 漆谷倭館鐵橋 (낙동강구철교, 호국의 다리, 왜관 인도교)
등록문화재 제406호

칠곡 왜관철교는 경부선의 약목역과 왜관역 사이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도교였다. 이 다리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부설한 군용철도의 교량이다. 1941년에 경부선이 복선화하면서 상류 쪽에 복선 철교가 건설됨에 따라 칠곡 왜관철교(낙동강 구철교)는 인도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때 폭파된 다리로 호국의 다리라고도 한다.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괴군에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후퇴하려 해도 내어줄 땅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대구와 최후 거점인 부산은 지켜내야 했다.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이곳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괴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됐던 왜관철교(맨앞쪽). 상단 트러스가 없는 부분이

                             폭파됐던 부분이다.
 
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에 적 게릴라 침투를 막는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오후 8시 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 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북한군은 9일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에 들이닥쳤다. 새벽에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 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

왜관읍 303고지에서는 15일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남아 북한군의 야만성과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을 알렸다. 16일 미 B-29 폭격기 98대는 낙동강 서쪽 강변에 960t의 융단폭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폭격이었다.
왜관 자고산 고지(303고지)에서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손이 묶인 채 학살당한 미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유엔군사령부는 1950년 8월 16일 왜관읍 북쪽 낙동강 서족에 융단폭격을 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칠곡 왜관철교는 경부선 개통 당시에 가구조목교였는데 1908년 4월에 낙성을 보았다. 교각의 기초를 전부 정통공법(井筒工法)에 의하여 1905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6월 교대(橋臺) 교각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가형(架桁)에 착수하여 곧 열차의 운행을 보게 되었다.

칠곡 왜관철교(낙동강구철교)는 인도교로 활용되다가 교각의 부식과 노후로 인하여 1979년부터 사람과 자동차의 통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후 1991년 8월에 보수작업에 착수하여, 1993년 2월부터 차량통행은 금지되었고 사람의 통행만 가능하다.

현재의 왜관철교는 칠곡 왜관철교(낙동강구철교)의 상류 40m 지점, 즉 경부선의 서울 기점 295km에 와렌 트러스(Warren truss)형으로 길이 506.9m의 단선교(單線橋) 2개로 상행선과 하행선이 각각 건설되었다. 구형(構桁: 자재를 삼각형으로 짜서 맞춘 구조의 도리)은 구형판형(構桁鈑桁)으로 정통공법에 의하였다. 또한 경간(徑間)은 상·하행선 모두 15.02m의 2연과 45m의 10연으로 구성된, 탄알에도 견디는 최신식 교량으로 상행선은 1939년에, 하행선은 1944년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1950년 9월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이 왜관 전선에서 퇴각하게 되자 철교의 가복구가 시작되어 1950년 10월 상행선이 개통되었으며, 1951년 4월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국회의장, 무초 미국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가복구 준공식을 가졌다. 그 뒤 1952년 1월에 철교복구공사를 시작하여 1952년 4월에 완전개통 되었다. 이 공사는 6·25전쟁 때 파괴된 철교를 완전히 복구한 최초의 일이었다.

왜관철교는 고속철도를 제외한 경부선의 모든 열차가 이곳을 통과하며, 인근의 구미공단 일대에 컨테이너 하치장이 있어 수출입 관련의 컨테이너 물량은 모두 왜관철교를 경유한다. 칠곡 왜관철교(낙동강구철교)는 철로로 이용되지 않고 보행자들이 다닐 수 있도록 개조하였으며, 6·25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건축물로 2008년 10월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철교 남쪽에 칠곡 구 왜관터널은 1905년 경부선의 터널로 개통된 석조와 붉은 벽돌로 된 말굽형 터널이다. 근대 철도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돼 2006년 12월 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285호로 지정됐다.

높이 3.5m, 길이 80m인 이 터널은 반원 형태로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비교적 정교하게 건립되었으며, 1941년 경부선 복선화 사업으로 철로가 이설 되면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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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