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해남 명량대첩비 (鳴梁大捷碑)

숙종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해남 명량대첩비 (鳴梁大捷碑)

196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97년(선조 31) 9월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우수영(右水營)을 옮기고,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이곳해남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숙종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높이는 2.67m, 폭은 1.14m이다.



                                                                    보물 503호 명량대첩비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그가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순신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 결정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들과 함께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즉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다짐을 한 채 왜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9월 16일 왜군이 133척의 배를 몰고 명량으로 공격해왔다. 명량은 일명 울돌목이라 불리는 곳으로 길목이 좁고 물의 흐름이 거센 곳이었다. 명량의 거센 물살에 휩쓸린 왜군의 배들은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이때 조선의 군사들이 맹렬하게 공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명량해전은 바다의 조건을 이용해 10배도 넘는 전력을 가진 왜군을 물리친 전투이며,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바뀐 중요한 승리로서 의미를 갖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패전, 만행, 약탈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유적지는 모두 소각하거나 철거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수의 일본인이 문화재를 도굴하거나 왜란 관련 유적지를 훼손, 철거하는 데 앞장섰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은 명량대첩비 등을 철거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았다. 경찰은 인부, 목수, 학생들을 동원하여 높이 2.67미터, 폭 1.14미터나 되는 비석을 500미터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은 흔적도 없이 제거했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복구하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라남도 경찰부와 조선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통 운반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청(美軍政廳)에 협조를 요청하여 비석을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긴 후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는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왔다. 1947년 이곳 해남 남쪽 끝 해안지역 학동리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이어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다. 크게 부족한 자금 마련을 위해 풍물패를 조직하여 나주 · 무안 등 8개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고 대첩비 탁본을 수백 장 만들어 여러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에야 비각이 완공되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동안 해남 충무사 경내에 있던 비석과 비각은 2011년 3월 본래의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 

해남 명량대첩비를 통하여 명량해전 당시의 상황과 이순신의 업적을 알 수 있어 가치가 큰 자료다. 2014년 ‘명량’이라는 영화가 개봉해 1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며 명량대첩을 향한 관심을 끌어올린 바도 있다. 이처럼 여러 매체를 통해 명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공적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명량대첩비 비문은 다음과 같다.

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篆題)
有明朝鮮國統制使贈諡忠武公鳴梁大捷碑 資憲大夫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李敏叙撰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李正英書 崇政大夫行知敦寧府事兼知經筵事同知春秋館事弘文館提學五衞都摠府都摠管金萬重篆 萬曆二十五年丁酉九月統制使李公統舟師進駐於珍島之碧波亭下大破日本賊於鳴梁之口賊由是大䘐不敢窺海右逼湖圻其明年賊遂罷兵歸世謂中興戰功公爲第一而鳴梁之戰最奇云盖公初以全羅左水使聞賊至慷慨誓衆進兵於嶺南界中邀擊沿海賊初戰於玉浦再戰於唐浦復戰於固城之唐項浦皆以小擊衆 殺賊無算卒乃大捷於閑山威震海隅乃進拜統制使悉總三道舟師仍屯閑山數歲賊亦不敢復 搶海路至是賊再擧大至懲前之敗蓄憾專力欲衝海道直上時公方被誣逮命以白衣從元帥俄復授舊職於是元均已代公大出兵迎賊軍遂陷盡喪其舟師器械蓄積而閑山已陷矣顧公乘喪敗之後無兵可戰間關走海上稍收亡卒得戰艦十餘艘遂進扼鳴梁賊至者樓櫓蔽海公督諸將進舡當海之隘口連艫下碇截中流待賊鳴梁地迫陿潮方盛水益急賊從上流乘潮揜之勢若山壓士卒無生意公意氣益勵乘機奮擊將士皆殊死戰舡出入如飛 砲火四起海水盡沸賊舡焚燒撞碎沉溺死者不可勝數賊遂大敗遁去始戰方酣巨濟縣令安衞少却公立舡頭大喝命左右取衞頭衞懼還八疾戰是日破 賊舡五百艘斬其將馬多時時南民避賊從公者百餘舡未戰公令分舡泛海爲疑兵及戰舡上觀者皆失色謂公兵少當沒及賊退戰氛息見我舟屹然無 恙皆大驚爭來賀自是軍聲復大振夫自李鎰申砬敗後官軍及義軍遇賊輒奔潰無敢畧齟齬其鋒者及天子遣大兵來救大震殱次第復三都然後我軍稍稍掎角之如延安幸州之捷雖一時稱雋然皆籍天兵威重僅能嬰城拒守得全未有獨當一面鏖戰全勝如公之爲者也故賊屯湖嶺六七年不敢蹈 西海一步地南原旣陷賊勢尤張而猶狼顧不得逞者繄公是賴至若露梁之戰大戰而又大勝臨陣殞命卒以身殉國公死而賊亦退其後朝廷論平賊功 以公爲元勳追賜宣武功臣號贈官至左議政立忠愍祠於露梁以祀之公諱舜臣字汝諧牙山人公平居循循雅飭如儒士及其臨難討賊決策出奇雖 古名將不能過而忠義奮發有可以貫日月而感鬼神者是以所在克捷威懾鄰敵義動中國若公者乃古所謂眞將軍可屬大事者非專以一時取勝爲可 貴也其行已之大方用兵之大畧國史及他銘述備矣不佞少過鳴梁觀公戰地慨然太息彷徨久之想見其爲人今南人立石於其地使來謁銘義不敢辭 遂略叙其舊聞系之以詞詞曰鳴梁口兮隘而束海潮蹙兮汨兩峽 兵因地兮利出奇藐羣醜兮勢莫支士卒奮兮皷方震俄殱賊兮蕩餘燼惟將軍兮勇義俱扼海道兮」海無虞怒濤擊兮蛟鯨趍觀戰地兮想英謨靈皇皇兮赫海隈  呵星辰兮走風雷海不竭兮石不泐昭壯烈兮耀無極崇禎後乙丑三月日書嘉善大夫行全羅右道水軍節度使朴新胄戊辰三月日立監役出身韓時達

통제사(統制使) 충무이공(忠武李公)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조선국(朝鮮國) 통제사(統制使) 증시(贈諡) 충무공(忠武公)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 이민서(李敏叙) 지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이정영(李正英) 씀. 정대부(崇政大夫) 행지돈녕부사(行知敦寧府事) 겸 지경연사(兼 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衞都摠府都摠管) 김만중(金萬重)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明나라의 연호, 1573~1620년) 25(1597)년 정유(丁酉) 9월에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명량(鳴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이 크게 위축되어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공(公)인데, 그중에서도 명량의 전투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고 한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가 해안가로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옥포(玉浦)에서 두 번째는 당포(唐浦)에서 그리고 다시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죽인 적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한산도(閑山島)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그 위세(威勢)가 크게 떨치니, 이에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統制使)에 임명하여 삼도(三道; 慶尙·全羅·忠淸)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한산도에 몇 해 동안 주둔하게 되자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 해에 이르러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과거의 패전을 설욕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재차 공격해왔는데, 바닷길로 쳐들어와 바로 서울로 향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때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옛날의 통제사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균(元均)이 공을 대신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과 싸우다가 적의 계략에 빠져 배와 병졸과 장비와 군량미 등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마저 적에게 빼앗겼다.

돌아보니 이미 패전한 뒤인지라 싸울 만한 군사가 없었다. 관문을 점검하고 바다 위를 부지런히 다니며 점차 도망간 군졸들을 모아들이고 전함(戰艦) 십여 척을 마련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아가 명량 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자 적군의 망루(望樓)와 노(櫓)가 바다를 덮는 듯 하였다. 공은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몰아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뱃머리를 나란히하여 닻을 내리고 중류(中流)를 막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 이를 본 우리 사졸들이 모두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공은 힘을 내어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틈타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모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웠고, 배는 나르는 듯이 적선들 사이를 출몰하며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니 바닷물도 끓어오르는 듯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처음 전투가 벌어지려 할 때에 거제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衞)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이에 공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호령하며 좌우에 명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니, 안위가 두려워 돌아와서는 여덟 번이나 용감하게 싸웠다. 이 날에 격파한 적의 배가 오백여 척이며,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었다. 이 때에 남쪽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여 공에게 와서 따르는 자들의 고기잡이 배가 백여 척이 되었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공이 이 배들을 나누어 바다에 띄어 놓아 마치 전투함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배 위에서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여 공의 군사가 적으니 응당 몰살당할 것이라 염려하더니, 적이 물러나고 싸움이 일단락되자 우리 편의 배들만이 바다위에 우뚝 남아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놀라 다투어 몰려와 치하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군대의 성세(聲勢)가 다시 크게 떨치게 되었다.

앞서 이일(李鎰), 신립(申砬) 두 장군이 패전한 이후로는 관군이나 의병이나 모두 적을 만나기만 하면 무너지고 패주하여 감히 적의 예봉을 조금이라도 막아내는 자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가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함에 미쳐서야 크게 적군을 섬멸하고 이어 삼도(三都)를 수복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 군대들도 점차 적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연안(延安)과 행주(幸州) 등지에서의 승전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는 모두 중국 군대의 위세에 힘입어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하니, 공과 같이 한 지역 전체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적을 무찔러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적들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역을 차지한지 6, 7년에 이르러도록 감히 서해안 지역으로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였던 것이다. 남원(南原)이 함락되자 적의 기세가 더욱 성하였으나 그저 쳐다만 볼 뿐 감히 나오지 못한 것도 모두 공의 덕분이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량(露梁)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운명(殞命)하여 나라에 몸을 바치게 되었으 며, 공이 죽자 적들 또한 이 땅에서 물러났다. 그 후 조정에서 왜란을 평정한 공을 논의할 때에 공을 으뜸으로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노량에 충민사(忠愍祠)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니 아산(牙山) 출신이다. 공은 평소에 거처할 때에는 부드럽고 온순하며 단아하고 조심스러워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난리에 임하여 적을 토벌할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과감하게 내어놓으니 비록 옛날의 뛰어난 명장(名將)이라도 공에게는 미칠 수 없었다. 또 한번 충의(忠義)를 떨쳐 분발하면 그 기상이 해와 달을 꿰뚫고 귀신을 감복시킬 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능히 이겼으니, 그 위세는 옆에 있는 적군들을 두렵게 하였고, 그 의리는 중국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공과 같은 이는 예로부터 일러오는 이른바 진정한 장군으로 가히 국가의 대사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이니, 단지 한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것만이 귀중한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그의 행동거지의 대범함이나 군사 작전의 책략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다른 저술에 자세히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노량을 지나면서 공의 전투지를 보고는 분개하여 탄식하며 한참 동안이나 이리저리 헤매며 그의 사람됨을 그려보곤 하였다. 지금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그 곳에 비를 새우고자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그 비문을 짓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이에 옛날에 들은 바를 대략 기록하고 이어 사(詞)를 짓는 바이다. 사(詞)에 이른다.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새까많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들 버틸 수가 없었네.
사졸들이 분발하고 북소리 울리니,
잠깐 사이에 적들을 섬멸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네.
오직 장군만이 용기와 의협심 모두 갖추어,
바닷길 지켜내니 바다에 아무 근심 없었다네.
성난 파도 부딪치어 마치 고래들이 달리는 듯,
옛 싸움터 바라보며 가슴 속에 영웅을 그리네.
영혼은 아름답고도 성하게 바다 한 편에 빛나고 있으니,
별들을 호령하고 바람과 천둥을 부리는 듯하도다.
이 바닷물 마르지 않고 돌이 닳지 않듯이,
밝고도 씩씩한 기상 영원토록 빛나리.
숭정(崇禎) 후 을축(乙丑)년 3월 일 지음.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전라우도수군절도사(行全羅右道水軍節度使) 박신주(朴新胄)가 무신(戊辰) 3월 일에 세우다. 감역(監役)은 출신(出身) 한시달(韓時達)이다.

                                   일제 강점기 우수영 원경(국립중앙박물관)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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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