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언어 교육 문화유산

우리는 한문교육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언어교육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는 물론이고,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까지 훌륭한 수준으로 가르쳤다.

우리의 언어교육 문화유산

국제화 시대, 세계시민교육 등이 중요한 오늘날 외국어 교육은 필수를 넘어서는 중요성이 있다. 모국어 교육뿐 아니라 언어 교육은 세계화 시대 자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언어 교육은 언제부터 중요하였을까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보물


길이 약 34㎝, 윗너비 11㎝. 1934년 경주군 현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되었다. 두께 약 2㎝의 돌에 대략 1㎝ 정도 크기의 문자 74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는 뾰족한 송곳 같은 것으로 다소 거칠게 새겼는데, 모두 5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행의 글자 수는 10~18자로 고르지 않다. 글자가 새겨진 면은 위가 약간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은 모양을 했다. 신라 시대의 청년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이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일종의 금석문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고 기록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니고 지키며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져도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지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詩)·상서·예·전(傳:춘추좌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이 서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하나는 임신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년 전인 신미년에 행한 것이다. 신미년에 행한 서약은 유학 경전의 학습이 주된 내용이고, 임신년의 것은 장차 실천궁행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두사람은 신미년에서 시·상서·예기를 학습할 것을 맹세했으나 실제로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다음해에 다시 한번 이전의 서약을 확인하면서 3년 후에는 실천궁행할 것까지도 함께 맹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고 임신년과 신미년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경〉 〈상서 尙書〉 〈예기〉 〈춘추좌전 春秋左傳〉 등이 신라시대 국학의 주요학과목이라는 점에 착안해 작성 연대를 국학이 설치된 이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학사상과 유학서적이 수용되고 학습이 이루어진 것은 보다 훨씬 이전이며, 새겨진 문체나 글자체가 〈남산신성비 南山新城碑〉(591)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삼국 통일 이전인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용상 두 사람은 청년으로 짐작되므로 화랑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화랑의 활동이 융성하던 통일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언어 교육이라고 하면 지금은 말하기와 듣기 같은 구어 교육을 주로 생각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읽고, 쓰는 문어능력이 중요했었다. 지금은 문자가 아니어도 배우고 소통할 수 있는 수많은 도구가 있지만 예전에는 문자가 가장 중요한 학습의 수단이요, 소통의 수단이었다. 한자는 동아시아 학문의 수단이고,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 다른 이와 문자로 소통해야 하는 이들은 모두 한자를 배워야 했다. 한자, 한문과 관련된 교육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말과 다른 문자와 어휘, 문법을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문의 어순이 우리말과 맞지 않아서 우리말의 어순으로 표기해 보기도 하고(임신서기석)), 우리말 어휘나 조사, 어미 등을 표현하기 위하여 향찰(《삼국유사》)이나 이두 등의 표기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음소표기인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는 한자가 유일한 표기수단이었고, 한자를 배워야 소통이 가능하였음도 부인할 수 없다.

                                                훈몽자회 책판 Ⓒ부산광역시청 

                  조선전기 학자 최세진이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하여 1527년에 간행한 교재. 한자교학서.

한자교육에도 지름길이 필요하고, 노하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한자교육에 관해서는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책이지만 《천자문》을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문제점을 발견하였던 것은 우리였다. 《천자문》은 고사가 담긴 좋은 책이지만, 한자를 처음 배우거나 어린아이에게는 적합한 책이 아니었다. 한자의 배열이 학습의 순서와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천자문》 참조).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는 이러한 《천자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치기 위한 글자를 모아놓은 책이라는 의미의 《훈몽자회》는 기존의 《천자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천자문》은 고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어려운 글자가 앞에 나오고, 문법적인 한자의 체계를 고려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천자문을 따라 외우기는 하였으나 정확한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주 쓰이지 않는 한자가 많이 나오는 문제도 있었다. 《훈몽자회》는 자주 쓰이는 한자와 문법에 쓰이는 허사를 구별하여 제시함으로써 획기적인 한문교육의 진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훈몽자회》에 주목해야 할 점은 한글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훈몽자회》 참조).

훈민정음 창제 이전 한문교육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가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이 모두 중요한 내용을 필기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늘 천’을 이야기해도 ‘하늘’이라는 뜻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천자문》에 각 한자의 뜻을 한글로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진전이었다. 정확한 의미를 한글로 적을 수 있었기에 교육의 효과는 올라갔을 것이었다. 한글의 위대함은 언문교육뿐 아니라 다른 언어교육에서도 빛을 발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한어 등을 배우던 책에 당시의 중국어 발음이 담겨 있어서 당시의 중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우리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천자문》을 보면 한자와 함께 한글로 뜻이 쓰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어휘를 탐구하는 데도 훌륭한 자료가 된다. 석봉천자문, 광주천자문을 통해서 수많은 고유어를 찾게 된다. 《이항복 해서 천자문》에서도 우리말 어휘를 만날 수 있는데 귀여운 손자를 위해서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들었다는 이 천자문은 할아버지의 정성이 생각나서 더 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조선시대에 많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하여 천자문을 썼다고 하니, 문자교육이 곧 손자 사랑이었던 셈이다.

                              02.《천자문》 03.《이항복 해서 천자문》

우리는 한문교육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언어교육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는 물론이고,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까지 훌륭한 수준으로 가르쳤다. 일상 회화 중심의 《노걸대(老乞大)》와 전문 분야 중심의 《박통사(朴通事)》라는 책은 구어 중심의 교육이었고, 내용 중심과 상황 중심이라는 현대 언어교육 체계의 수백 년 앞선 논의였다. 현대 서양의 언어교육학자들은 의사소통 중심 교수법, 내용 기반 교수법 등을 최신 논의로 내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몇백 년 전에 이 같은 학습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걸대》와 《박통사》도 각각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 박통사언해, 번역박통사 등으로 편찬되어 이해를 돕게 된다.

그 밖에도 유해(類解)로 대표되는 사전류의 편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어유해(譯語類解), 몽어유해(蒙語類解), 왜어유해(倭語類解), 동문유해(同文類解) 등이 대표적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방언유석(方言類釋)》 같은 책은 한자, 우리말,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까지 제시하고 있는 대역 표현집이다. 한편 일본어를 빨리 배우기 위한 ‘첩해신어(捷解新語)’ 등의 개발도 이루어졌다. 이들 교재는 외국어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문화가 세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언문을 가르쳤음이 분명하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언문청이 설치되었고, 관리들에게 언문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교육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중에서는 언문의 사용이 많았고, 한글 편지나 한글 문학작품이 발달한 것으로 봐서 한글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훈몽자회》의 서두에 언문교육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유학자의 경우에도 한글의 사용은 자유로웠을 것이다. 《훈몽자회》나 《천자문》에 한글로 뜻이 쓰였기 때문에 한글을 모르고서는 한자 학습도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글 학습에 관한 자료가 특별히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한글의 습득이 과히 어렵지 않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천자문》을 배우기 전에 가정에서 한글을 배웠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한글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책은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난다. 주시경의 우리말 연구는 한글 강의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화유산은 화려했다. 세계 최고의 언어교육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다양한 교재와 사전이 편찬되었다. 《천자문》, 《훈몽자회》를 비롯한 문자교육의 수준도 매우 높았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 교육도 폭넓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자문》 등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글 교육이 먼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글 교육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운동이 되었고, 지금은 세계 속에 수많은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교육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도 앞으로 문화유산이 될 수많은 자료가 있다. 최초의 한국어 교재, 한국어 시험지 등 현재의 자료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한국어 문화유산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조현용(경희대학교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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