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덕흥리고분, 고구려 강역은 중국 본토 입증

북한 덕흥리고분, 고구려 강역은 중국 본토 입증

성헌식의 ‘대고구리’[고구려 강역<1>]…황제국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 드러나


한류가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드라마, K-pop, 음식 등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화장품, 의료 등 한국제라면 뭐든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의 한류열풍은 대단하다. 또한 세계인들은 작은 나라인 한국인들이 초강대국인 중국인과 경제대국 일본인을 낮추어보는 것에 대해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위대하고 장엄했던 우리 역사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한류에 아시아인들 특히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의 피 속에 우리와 같은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한류에 쉽게 동화되는 이유는 한류를 접하고 나면 왠지 고향사람을 만나 고향소식을 전해들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런지 그 역사의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나가보도록 하겠다.


1.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글자)
1976년 북한의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무덤 하나가 발굴되었다. 그 위치가 고구려 도읍지 평양과 가까운 곳이고, 거기에 그려진 고분벽화가 완전한 고구려 풍이기 때문에 그 고분은 고구려인의 무덤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게다가 고분 천정에 씌어져있는 글자(묵서명)에 따르면, 무덤의 주인공이 죽은 해가 광개토태왕의 연호로 기록되어 있어 더욱 그렇다.


▲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구려고분의 외경(위 사진)과 고분 천장에 씌어져 있는 묵서명. <사진=필자제공>


이 무덤이 발견되자 한·중·일 사학계가 모두 발칵 뒤집어졌다. 일본과 북한사학계는 광개토태왕이 북경 부근인 유주까지 진출했었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중국사학계는 중국에서 유주지사를 지낸 사람이 고구려로 귀화해 광개토왕의 신하가 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반면에 남한사학계는 입을 굳게 닫았으며, 현재까지도 그 고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도대체 고분에 무슨 내용이 있기에 모두들 그렇게 했을까? 먼저 묵서명을 소개한다.


(묵서명 번역문) “□□군 신도현(信都縣)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遼東)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幽州)자사였다. 진은 77살에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408년) 신유월(12월) 을유일(25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와 쌀은 다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구는 신도현에서 출생한 무덤의 주인공 진이 77세에 무신년에 죽었는데 무신년과 일치하는 영락 18년이라는 광개토태왕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이고, 진이 역임한 벼슬이 중국의 관직인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락’이라는 분명한 명문 때문에 유주자사 진이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중국사학계는 중국에서 그런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 고구려로 귀화한 것이라는 어불성설의 주장을 폈다.

줏대 없는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대체로 중국의 설을 따르고 있는 편이다. 그러면서 진이 출생한 신도현은 아무 근거도 없이 황해도 박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 고구려에 다시 와서 광개토태왕 때 죽었다는 얘기인데, 이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도대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즉, 황해도 박천은 잘못 비정된 것이다.

▲ 덕흥리 고분에 대한 당시 신문보도. <자료=필자제공>


그렇다면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사적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①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무덤의 주인공 진이 태어난 ‘신도현’을 검색해보면 산서성 남부 임분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중국사학계는 진이 중국출신이고 유주자사를 지낸 후 고구려로 망명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진의 고향인 산서성 남부까지 고구려 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② 진이 유주자사와 요동태수라는 지방장관을 역임했다는데, 그가 고구려 출신이라면 이들 관직은 고구려에서도 사용한 관직명이고 유주와 요동은 당연히 고구려의 영토인 것이다. 중국은 요동을 요녕성 요하 동쪽, 유주를 북경부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과 북한사학계가 광개토태왕이 북경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 덕흥리 고분의 내부투시도> <자료=필자제공>


③ ‘부는 7세에 미쳐’라는 문구로 보아 유주자사 진의 무덤은 사후 약 200년 후 원래 묻혔던 어딘가에서 평남 덕흥리로 이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진이 죽은 후 바로 이 무덤을 만들었다면, 묵서명에 ‘부는 7세에 미쳐’라는 문구를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④ 또한 후손의 직위가 후왕(侯王)에 이르렀다는 문구로 보아 당시 고구려는 왕(제후)을 거느린 황제국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는 자체연호를 쓴 황제국임이 확실하고, 그 이후에도 줄곧 황제국이라는 말인 것이다.


⑤ 고구려 지방장관을 지낸 진의 무덤 크기가 공주 무녕왕릉의 1.5배여서,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백제에 비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⑥ 황제도 아닌 일개 대신의 무덤을 만드는데 1만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술·고기·쌀은 먹지 못할 정도라는 문구로 미루어 보아 당시 고구리의 국력과 풍요로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하겠다.


2.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13태수 벽화

또한 덕흥리 고분에는 13명의 태수가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13태수의 그림 옆에 ‘XX태수’라고 씌어져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태수는 군(郡)을 다스리는 직책이고, 그 군들이 모인 주(州)를 다스리는 관직이 자사이다. 현재 우리 관직으로 설명하면 태수는 시장/군수를, 자사는 도지사와 같은 개념이다.
 

▲ 무덤의 주인공에게 13태수들이 정무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필자제공>


그 지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들이 꽤 있는데,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한사군으로 잘 알려진 낙랑군과 현토군이다. 과연 이곳들의 위치는 어디일까?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토(玄兎)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이고,  1명은 판독 불능
<본 칼럼은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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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