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릴 뻔한 국보

국보 은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 은입사 향완으로 고려시대 향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잃어버릴 뻔한 국보,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가치와 아름다움

현재 밀양 표충사호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 은입사 향완으로 고려시대 향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유물 도난이 다소 빈번했던 1960년대에 도난을 당해 영영 되찾지 못할 뻔 했다. 하마터면 사진으로만 남을 뻔했던 이 향완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자.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1177년, 높이 27.5cm, 입지름 26.1cm, 표충사호국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원은 2017년부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세에 잘 전달하기 위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의 보존 상태와 관리 환경을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국보·보물의 정기조사는 도난, 방화 등에 따른 문화유산의 훼손과 손실 등을 예방하고 안전한 보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2008년부터 문화재청이 시행하고 있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가 미비했던 과거에 수난을 겪은 문화유산 중 하나였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1957년 경남 일대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돼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향완은 국보로 지정된 후 불과 3년 뒤인 1965년 1월 소장처인 표충사 유물관에서 도난 당했다. 도난 사실은 향완의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자 사찰을 방문한 밀양교육청의 문화계장이 향완보관함이 부서진 것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경찰의 추적 끝에 3월 29일에 범인을 특수절도 혐의로, 향완을 사들였던 골동품상을 장물취득 혐의로 검거했고 결국 향완도 되찾았다. 수사를 통해 알려진 도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사찰 유물을 노린 도둑들이 새벽에 표충사 유물관에 난입해 향완과 금강저 등을 훔친 후, 쌀 두말을 구입해 그 속에 유물을 숨기고 서울의 골동품상을 찾아가 5만 원에 팔아 넘겼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도난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당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후 문화유산의 도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해당 사건이 회자되었다.


                                                                 향완 받침의 용무늬

불교에서 향은 불전에 바치는 대표적인 공양물 중 하나로 향을 피우는 향로 역시 중요한 공양구로 이용되었다. 향완은 불단에 놓이는 거향로(居香爐)의 일종으로 형태는 술잔 또는 높은 받침이 달린 그릇을 닮은 고배형이다. 향완은 불교의식이 특히 빈번했던 고려시대부터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명칭은 『고려사』와 몇몇 향완의 명문에서 확인된다. 향완은 시기에 따라 형태, 은입사의 유무, 시문된 문양의 종류 등이 다양하다. 도난으로 잃어버릴 뻔했던 국보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먼저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기형적 특징을 살펴보자. 이 향완은 일반적인 고려시대의 향완과 마찬가지로 몸체인 노신(爐身)과 다리 부분인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번에 주조한 것이 아닌 노신과 받침을 따로 제작해 서로 결합했다. 노신 구연부에는 넓적하고 평평한 전이 부착되어 있고 받침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며 완만한 곡선을 이뤄 마치 나팔 입구와 같다. 높이와 너비가 거의 대등한 비율로 제작되어 안정감 있는 균형미와 곡선미를 지녔다.

이 향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어두운 빛깔의 기형 위에 은입사로 밝고 정교하게 묘사된 다채로운 문양이다. 은입사기법은 기형의 표면에 문양의 형태를 따라 홈을 파고 은선을 끼워 넣는 기법으로 기법상 고려시대의 도자기 상감기법, 목공예의 나전기법과 유사하다. 이 향완에는 은입사기법으로 주 문양인 범자와 용무늬, 종속 문양인 구름·연꽃·여의두·쌍엽무늬 등을 향완 전면에 장식함으로써 향완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특히 받침에 새겨진 용의 묘사가 압권인데 섬세한 선으로 그린 형태에 뿔, 배, 갈기, 발톱 등을 면상감으로 처리해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쫓는 용의 모습을 생동감 있고 입체적이며 회화적으로 연출했다.

그렇다면 완만한 기형으로 제작되어 뛰어난 기법으로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 이 향로는 언제, 누가, 어떤 이유에서 제작한 것일까? 다행히도 이 향완에는 제작시기와 그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이 향완의 구연부에 있는 넓은 전의 뒷면과 받침대의 안쪽 면에 각각 음각과 점각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대정 17년(1177년) 정유년 6월 8일에 산 자와 죽은 자가 보리를 증명할 것을 발원하면서 청동함은향완 하나를 주조했으며 무게는 8근이다.

효초가 중임을 맡아 강주 등과 함께 제작했다.’, ‘창녕 북면 용흥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명문은 이 향완의 제작 시기, 발원 내용, 조성자, 재료와 무게, 기법, 사용처 등을 밝히고 있는데, 특히 ‘함은’은 은입사기법이 적용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향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년명을 가진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 <황통4년명 청동향완>(1144년)과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백월함 청동 은입사 향완>(1164년)의 뒤를 이어 제작된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청동 은입사 향완으로서 12세기 청동 은입사 향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비교 자료로서 가치를 더한다.

만약 1963년 1월 19일 밀양교육청에서 표충사를 방문하지 않았거나, 언론에서 도난사건을 지속해서 보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거나, 경찰의 수사가 조금만 더디었거나, 범인들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현재 우리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지속적인 관리와 보호 그리고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글, 사진. 유혜민(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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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