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와 현판 복원 옛 모습 찾은 광화문

경복궁 궁성 남문인 광화문의 이름은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에 명하여 지었다. ‘광화(光化)’란 국왕의 통치에서 우러나오는 빛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광화문 월대와 현판 복원 옛 모습 찾은 광화문


오랜 기간 경복궁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복원을 진행해 온 문화재청은 지난 10월 15일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공간인 월대가 복원됨으로써 광화문이 완전히 제 모습을 찾았음을 알렸다. 온전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돌아온 광화문이 '광화(光化)'의 뜻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빛의 길이자, 광장의 국민에게 다가가는 소통의 길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월대 궁궐 정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 앞에 넓게 설치한 대(臺)로 궁궐 정문 앞에 기단을 쌓고 난간석을 두른 것은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국가의례와 외교, 위민과 소통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광화문 월대는 1890년대 이전의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10월 15일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2006년 광화문 제 모습 찾기를 시작으로 그간 추진된 월대와 현판의 복원이 마무리됐음을 알리기 위해 ‘광화문 월대 새길맞이’라는 슬로건으로 준비됐다.


광화문 현판 『경복궁영건일기』에 따르면, 광화문 현판은 훈련대장 김태영이 글씨를 썼고,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로, 동판으로 글자 모양을 만들고 금 넉 냥을 발라 만들었다.

한편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사전에 신청한 국민 500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 행사에는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사전에 신청한 국민 500명이 참여했으며, 기념식 후 행사에 참석자와 시민들은 월대를 걸어 광화문으로 경복궁에 입장했다.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 도열한 수문장과 취타대가, 근정전 앞뜰에서는 도열한 문무백관이 국왕, 왕비와 함께 처음 월대를 밟은 입장객들을 환영했다. 특히 광화문과 궁궐 담장을 130m 가량 수놓은 미디어 파사드는 ‘연결, 소통, 창조’를 주제로 축하공연과 함께 상영되어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월대를 장착하고 완전체로 돌아온 광화문 꽤 오랫동안 담장에 막힌 채 공사 중이던 광화문이 지난 10월 15일 모습을 드러냈다. 광화문 앞으로 넓고 길게 뻗은 월대가 생겨났고,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로 광화문이라 쓴 새 현판도 공개되었다. 광화문 앞은 늘 차량이 바쁘게 지나는 도로였는데, 지금의 광화문은 새롭고 낯설다. 그러나 이 모습이 광화문의 본래 모습이었다.


                        1902년경 광화문과 월대, 개인소장

경복궁 궁성 남문인 광화문의 이름은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에 명하여 지었다. ‘광화(光化)’란 국왕의 통치에서 우러나오는 빛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동서로 종묘와 사직을 두고 앞으로 주요 관청이 들어선 육조거리를 둔 법궁 경복궁 정문이니 광화문은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또 광화문은 나라의 시간을 알리는 곳이었다. 국초부터 문루에 건 종과 북을 쳐서 새벽과 저녁을 알렸고, 세종 때 물시계를 경복궁에 만들었을 때는 물시계가 시간을 알리면 이를 광화문에 걸린 종과 북으로 전하여 치게 하였다.

광화문은 각종 의례 장소가 되었는데, 광화문 앞에서 무과 과거시험을 치르고,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잡희(雜戲)를 베풀어 중국 사신을 영접했으며, 칙서를 맞이하기도 했다. 나라의 의례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던 곳이라 광화문 앞에 월대 같은 시설이 분명 필요했을 것이나, 1431년(세종 13년) 광화문 밖에 돌로 기단을 쌓자는 건의에 세종은 농사철에 민력을 쓰기 어렵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한 달 뒤 광화문이 완성되었다는 실록 기사가 있지만 이때 월대를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경복궁영건일기』에 따르면 1866년(고종 3) 3월 3일, 흙 4만여 짐으로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발굴 조사 결과 이때 만든 월대는 광화문 남쪽으로 길이 약 48m, 너비 약 30m로, 중앙에 약 7m 폭의 어도가 있었다. 월대 끝은 돌계단으로, 가장자리는 난간석으로 마감했다. 고종은 여기서 여러 왕실의례를 거행했고, 왕세자를 시켜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궐문 앞 월대는 궁 안팎의 사람들이 섞이고, 왕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공간이었다.

1894년경에는 광화문 월대 어도 끝 계단은 경사로로 바뀌었다가, 1915년 일제의 식민 지배 성과를 선전하려는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릴 즈음에는 어도가 없어지고 동서 계단 폭은 축소되어 월대는 넓은 경사로 형태로 변했다. 그후 1923년 광화문 앞에 전차 선로가 부설되면서 광화문 월대는 완전히 철거되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안에 지어지고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광화문 월대가 있던 곳은 완전히 도로가 되었다.

                           복원된 광화문 월대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석축만 남아 있다가 1968년 조선총독부 청사(당시 중앙청) 정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되었다. 복원 위치는 본래 광화문 자리보다 북으로 후퇴한 곳으로,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는 축에서 동쪽으로 틀어진 채 건립되었다. 2010년에야 광화문의 원래 위치를 찾아 목조로 복원했지만, 경복궁 앞을 지나는 도로 때문에 월대까지 복원할 수는 없었다. 광화문 월대 복원을 위해 사직로 형태를 바꾸고, 수년간 발굴과 고증조사를 거친 끝에 광화문은 다시 월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어떤 연유에선지 구리시 동구릉에 옮겨져 있던 월대 난간석을 찾아내고, 월대 어도 끝 계단 난간을 장식했던 서수상의 위치가 때마침 알려지고,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그 서수상을 기부하는 등 노력과 우연과 선의가 겹쳐져 그 역사성과 진정성이 더해졌다.

광화문은 조선왕조 권위와 역사의 상징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경복궁과 광화문은 유독 집요하게 훼손되었고, 전쟁의 상처도 아프게 겪었다. 광복 이후 광화문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광화문은 조선왕조만의 상징이 아니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도 광화문 앞은 온갖 굵직한 사건의 배경이었고, 국가대표 축구팀 응원부터 국가적 슬픔의 추모, 정부에 대한 항의와 의견표출까지 다양한 이유로 시민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장소가 되어왔다. 광화문은 이제 민주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고종 때 중건한 경복궁을 기준으로 광화문을 복원했다. 사실 어느 때건 광화문은 광화문이 아닌 적 없었으니 ‘본래’ 모습을 따로 정하는 것이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끝난 후에도 광화문은 더 풍부한 역사성을 지녀왔고, 이제 수십만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며 서울의 얼굴이다. 그런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으로서 가졌던 모든 요소를 갖추도록 복원하는 것은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 요소, 월대가 조선시대 왕과 백성 간 소통의 장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소통의 장인 광화문 앞의 상징성이 만나는 의미는 더 크지 않을까.  (문화재청 복원정비과,  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 이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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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