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비 인현왕후가 걷던 길

인현왕후 길은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에 있는 청암사에 머물면서 산책했던 옛길에서 유래하였다.

비운의 왕비 인현왕후가 걷던 길

김천시는 인현왕후가 3년 동안 기거했던 청암사를 품은 수도산 자락에 인현왕후 길을 만들었다.
인현왕후 길은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에 있는 청암사에 머물면서 산책했던 옛길에서 유래하였다.

인현왕후 길은 수도암을 800m 정도 남겨두고 오른쪽 산비탈 임도를 따라가게 된다. 인현왕후 길이 시작되는 수도리는 오래된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는 전나무, 느티나무 같은 고목 10여 그루와 서낭당 역할을 하는 돌탑 1기가 서 있다.


                                 동서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

                                          약광전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긴 계단을 올라가면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을 등지고 앞으로 펼쳐지는 모습은 선경이다. 첩첩이 이어져 있는 산줄기 너머로 연꽃이 막 피어나는 모양을 한 가야산 정상의 모습 때문이다. 신비롭게 핀 아름다운 연꽃은 계절마다 빛깔을 바꾸면서 피어오르니, 봄이면 황련, 여름이면 청련, 가을에는 홍련, 겨울에는 백련이 된다. 수도암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연꽃 모양을 한 가야산 봉우리가 거대한 불상인지도 모른다.

해발 950m에 둥지를 튼 수도암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보다 고도가 높아 주변의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와 깊은 맛을 자아낸다. 새싹을 돋운 나무들은 연둣빛 바다를 이루어 번뇌의 물결이 사라지고 지혜의 바다를 이루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 있는 듯하다.

수도암 가장 높은 곳인 대적광전과 약광전이 연꽃 모양의 가야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고, 당우 앞마당에는 동서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두 기가 서 있다. 암자 앞으로 멀리 단지봉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암자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 또한 한없이 포근하다. 두 당우에 모셔진 불상은 모두 석불이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크기의 거대한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은 엄숙하고, 약광전에 모셔진 석불좌상(보물 제296호)은 인자한 향기를 내뿜는다.

수도암에서 부처님께 예를 갖춘 후 오던 길로 내려오니 인현왕후길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출발지인 수도리에서 500m쯤 올라오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수도암 길과 헤어져 산허리를 따라 완만하게 돌아가는 인현왕후 길을 걷는다.

이 길을 인현왕후 길이라 부른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인현왕후는 조선왕조 19대 왕인 숙종의 비다. 자식이 없었던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비가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장희빈이 새 왕비가 됐다. 궐 밖으로 쫓겨난 인현왕후는 자신의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수도산 청암사에서 3년을 은거하며 복위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장희빈을 등에 업은 남인의 권력남용이 심해지자 숙종은 주도 세력을 서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됐다.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된 후 7년 만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인현왕후를 다시  v폐위 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던 장희빈도 숙종에 의해 인현왕후가 세상을 뜬 그해에 사약을 받아야 했다.

이 기간 인현왕후가 청암사에서 수도계곡의 절경지 또는 수도암까지 산책하며 애환을 달래던 길이,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왕비길 또는 인현왕후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인현왕후가 1694년 복위하면서 청암사를 떠난 후 스님들의 산책로나 나뭇꾼, 들짐승들의 통행로로 존속되다가 1980년대 초 산림청에서 산불 진화용 임도를 개설하면서 확장되었고 2015년 김천시에서 숲길을 조성하면서 지명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인현왕후 길로 명명되었다.



청암사보광전 (靑巖寺普光殿)

청암사는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8)에 도선국사가 세운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절이다.

보광전을 지은 것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정조 6년(1782)에 고쳐 세운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 앞서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폐위되어 이곳 청암사 극락전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극락전 서쪽에 인현황후의 복위를 빌기 위해 보광전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광무 9년(1905)에 다시 세웠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과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을 같이 보이고있다. 내부에는 42수의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고 벽면에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 신상도(神像圖) 등이 걸려 있으며 상벽에는 불화를 그려 놓았다. 현존하는 전통 건축 가운데 드문 절충식 구성법으로 사찰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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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