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에는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기록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그것으로,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을 수행하는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기록들

1392년 건국하여 518년간 존속한 조선 왕조에서는 왕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기록하는 매일의 일기가 있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그것으로,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을 수행하는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일기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시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승정원일기(구5136.) ©e뮤지엄

조선시대 역사를 대표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 태조에서 순종까지 전 왕조의 기록을 남긴 데 비해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이다. 그러나 책의 총 수량은 3,243책으로, 실록의 완질본이 1,187책인 것과 비교해서도 엄청난 분량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매일 일어났던 사항을 기록해 그 상세함은 실록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에 실록청을 구성해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던 데 비해 『승정원일기』는 왕의 재위 기간에 바로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승사(承史)’라 칭하는 승지(承旨)와 주서(注書)가 공동으로 담당하고 최종 기록은 주서에게 맡겨졌다.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다시 한 달분을 정리해 왕에게 올려 재가받는 절차를 거쳤는데, 이때 일기가 밖으로 유출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인조에서 경종까지 초기의 기록은 두 달 또는 석 달의 기록이 한 책으로 편집된 예도 볼 수 있지만, 영조 이후에는 한 달 분량의 일기가 1책으로 편집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다. 『승정원일기』에는 본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승정원 관리들의 실명(實名)을 꼭 적어서 기록 주체를 분명히 하였다. 기록의 실명화는 이들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부여하는 조처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구5136.) ©e뮤지엄


『승정원일기』와 실록의 가장 큰 차이는 매일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 하루의 정치, 한 달의 정치, 일 년 정치의 흐름을 파악할 수가 있다. 왕의 동정과 함께 주요 현안 자료, 중앙이나 지방에서 올린 상소문의 원문까지 수록하여 1차 사료로서의 가치도 돋보인다. 왕이 정무를 보던 장소와 시간대별로 왕의 이동 상황 을 꼭 기록했기 때문에 국왕의 동선(動線) 파악도 할 수 있다. 특히 왕이 주체가 된 행사의 경우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보면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훨씬 세밀하다. 역대 왕이 자신의 병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약방이나 의원들에게 자문하는 모습, 왕의 기분과 병세, 나아가 왕실 사람들의 건강 상태에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과 신하들의 세밀한 대화까지 기록했다. 1760년(영조 36) 영조 시대에는 청계천 준천(濬川) 공사가 추진되었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와 신하들의 대화가 매우 자세해 마치 그날의 현장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록은 주요 사건의 개요만을 정리했지만, 『승정원일기』는 청계천 구간별 공사 현황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조실록』 1760년 3월 16일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청계천 준설공사를 완료하고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는 책자를 완성한 내용과 함께 영조가 담당자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간 지탱할 수 있는가를 묻자 그 효과가 백 년은 갈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실록에서는 간단히 요약된 사항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다. 우선 왕과 함께 면담한 인물의 관직과 성명, 왕과 신하들의 대화 내용이 모두 실려 있다. 왕이 직접 준천한 경계를 묻자 호조판서 홍봉한이 송전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답했으며, 수표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지역은 넓어서 공사가 힘들었다는 공사의 구체적인 내용, 왕이 직접 『준천사실』이라는 책명을 정한 사실 등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실록에는 미처 담지 못한 내용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조실록』의 1739년(영조 15) 5월 30일의 기록에는 “영조 대에 덕적도(德積島)에 군사시설을 두는 문제를 두고 강화유수가 지도를 작성해 올려보냈다”라는 내용만 나오고 지도 작성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런데 같은 날 『승정원일기』(1739년 5월 30일)의 기록에는 지도의 작성자는 강화유수의 군관(軍官)인 심동상과 경기수사의 군관인 이세황임이 나타난다. 『승정원일기』의 자세한 기록을 통해 역사 속에 묻힌 인물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1866년(고종 3) 3월 3일의 기록에는 고종이 직접 창덕궁 춘당대에 나아가 시험을 치러 인재를 선발한 기록이 나오는데, 왕이 거동한 시간과 입시한 신하의 명단, 왕의 복장과 궁궐에서의 이동 경로, 시험의 시행 과정, 시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시험 도중 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모두 기록하여 그날의 현장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승정원일기』의 앞부분에는 날씨 기록이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288년간 날씨가 매일 기록되어 있다. 날씨는 청(晴, 맑음), 음(陰, 흐림), 우(雨, 비), 설(雪, 눈)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전청오후설(午前晴午後雪, 오전에 맑았다가 오후에 눈이 옴)’, ‘조우석청(朝雨夕晴, 아침에 비가 왔다가 저녁에 갬) 등으로 하루 중 날씨의 변화까지 기록했으며, 비가 내린 날은 측우기로 수위를 측정한 결과를 꼼꼼히 정리했다. 『승정원일기』의 날씨 기록만 모아도 전통시대 기후 연구뿐만 아니라 미래의 기후 예측에도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승정원일기』는 근대사 연구에도 매우 유용한 기록물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실록의 특성상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으로 집필되어 정사(正史)로서 정통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시기 대체 자료로서 의미도 크다. 1876년의 개항 이후에도 조선 왕실 비서실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곳에서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승정원일기』는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이 지니는 한계성을 보완해 주는 1차 사료가 되는 것이다. 그 시기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나타났던 서구 열강 간 외교관계,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최장의 기록물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분량의 기록물로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 공간 속으로 우리를 생생하게 안내하고 있다. 특히 『승정원일기』에는 왕의 동선(動線)과 기분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문화 콘텐츠의 확보,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도 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지향하는 시대에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적극 활용해 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 후손의 몫으로 남아 있다. 글.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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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